건원릉의 부실은 조선 초기 왕실의 혼돈과 연관되다

[풍수지리학자의 명당 답사기(13)]

2015-08-26 11:28:48
건원릉을 조영할 당시 태종의 심정은 부왕을 명당지에 모셔 천년 조선왕국을 꿈꾸었을는지 모른다. 명당의 국세가 아니면 땅을 고쳐서라도 명당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열망이 오늘에 와서 건원릉이 명당처럼 보이게 하는 형세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 숨겨 둔 명당을 어찌 인간이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왕릉마다 어찌 다 명당지에 소점할 수 있겠나마는 태종이 그토록 공을 들여 찾은 부왕의 능지가 태조의 꿈 천년 조선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장릉.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장릉.
건원릉을 1408년에 조영한 이후 태종의 장자인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3남인 세종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업적으로 후세에까지 존경받지만 그의 자식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하게 되는 참극을 빚게 된다. 세종의 장자인 문종은 즉위 2년 만에 서거하고, 문종의 장자인 단종은 17세에 삼촌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후 왕위에 오른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군주라는 멍에를 평생 짊어지게 되고,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와 차자 예종이 20세에 요절하고,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마저 유년(幼年)에 요절하는 비운을 겪으며 왕통이 단절될 지경에 이르러 요절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성종으로 즉위시키게 된다. 이외에도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왕실의 참극이 많이 있었고 성종 이후에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등 비운이 계속된다.

건원릉의 동기감응에 의한 영향을 추리해 본다면, 1422년에 태종의 헌릉과 1450년 세종의 영릉이 조영되었으므로 헌릉과 영릉의 영향도 고려하여 건원릉의 부실한 결과가 세종, 문종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단종, 세조, 예종대에 이르기까지 60여년 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듯 건원릉의 부실로 인하여 조선 초기 빚어진 왕실의 참극뿐만 아니라 조선을 혼돈에 빠지게 했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면 왕릉지 선정의 중요성에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고향의 억새풀을 머리에 쓰고 내려다 보고 있는 건원릉.
고향의 억새풀을 머리에 쓰고 내려다 보고 있는 건원릉.
건원릉은 기록에서도 무학대사와는 무관한 능지로서 하륜의 건의로 태종이 소점할 당시에는 어떤 시각으로 보았는지 알 수 없으나 주변의 형세가 명당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또한 건원릉은 조선 초기 왕릉으로 왕릉조성의 표본이 되어 이후의 왕릉조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하여 이후에 조영된 왕릉들이 웅장한 외형을 갖추기 위해 인작(人作)이 성행됨으로써 부실한 ‘터’도 명당으로 조영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부정적인 영향을 만들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고려말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새로운 성리학의 이상을 가진 나라를 건국하며, 무던히도 많은 피를 흘린 태조가 말년에 왕자의 난을 보면서 비통함을 느끼고 후손들이 죽고 죽이는 왕실의 비극과 건원릉이 무관하지 않다. 특히 건원릉의 부실한 청룡은 왕실의 장자(長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로 인하여 왕실의 혼란과 결부되는 불행들이 발생하였다고 판단된다.

조선왕실의 큰 어른이신 태조의 왕릉이 외형적으로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던 것처럼 실속 있는 명당 ‘터’였다면 조선 초기의 왕실의 혼돈이 그처럼 없었지 않았겠나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문인곤 풍수지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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